SK하이닉스-한미반도체 HBM 동맹에 균열소송중인 한화세미텍에 수주주며 갈등 표면화공급망 관리차원서 벤더 다변화 당연해전세계 반도체 경쟁 심화하는데 협력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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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미반도체 듀얼 TC본더 장비ⓒ한미반도체
영희는 철수와 둘도 없는 친구 사이다. 서로의 집에 숟가락이 몇 개 있는지 알 정도로 막역한. 둘은 밥도 함께 먹고 숙제도 같이하며 서로의 우정이 영원할 것이라 생각했다. 민수가 나타나기 전까진. 영희는 민수와도 친하게 지내고 싶어 말을 걸었지만 그 사실을 알게 된 철수는 길길이 날뛰며 화를 냈다. 알고 보니 철수와 민수는 예전에 크게 싸워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 철수는 영희에게 “민수와 친하게 지내면 너와는 절교다”고 선언하고 등을 돌렸다. 철수와 민수, 모두와 친하게 지내고 싶은 영희는 고민에 빠진다.무슨 이야기냐 할 수도 있지만 영희가 SK하이닉스, 철수가 한미반도체, 민수가 한화세미텍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쉬워진다. 최근 반도체 출입 기자들 사이에서는 3사의 갈등이 뜨거운 감자다. 고대역폭메모리(HBM) 호황으로 영원할 것만 같았던 SK하이닉스와 한미반도체의 동맹이 한화세미텍이라는 경쟁사의 등장으로 금이 가고 있어서다.한미반도체는 SK하이닉스에 HBM 후공정(패키징) 핵심장치인 ‘열압착 본딩 장비(TC본더)’를 8년간 독점적으로 공급해왔다. 그러나 SK하이닉스는 올해 들어 한화세미텍으로부터도 TC본더를 공급받기 시작했다. 솔벤더(독점 공급업체)의 경우 행여나 해당 회사에 문제가 생기면 생산에 차질이 생기는 등 불확실성이 크다는 점에서다.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투자전략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라 보면 된다.한미반도체는 한화세미텍과 기술유출 및 특허침해 소송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다보니 한화세미텍을 듀얼벤더로 택한 SK하이닉스에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다. 화가 난 한미반도체는 서비스 차원에서 무료로 제공하던 유지보수 인력 철수를 결정하고 TC본더 가격도 25% 인상키로 했다. 또한 미국 마이크론 등 해외 기업들과 손잡고 수출 비중을 더욱 늘리기로 했다. SK하이닉스에 치중돼있던 매출 다변화에 나선 것이다.그야말로 이판사판이다. 한미반도체 측은 SK하이닉스에 장비를 공급하기 위한 기술 협력 과정이나 공급 이후 이를 유지, 관리하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잡음들이 있어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매출 상당수가 SK하이닉스에서 발생하는 ‘을’인 만큼 그들의 눈치를 보며 불합리한 요구나 조건들을 참아왔다는 것이다. 실제 지난해 기준 한미반도체 매출액의 53% 이상이 SK하이닉스에서 발생했다.다만 SK하이닉스의 공급망 다변화는 TC본더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SK하이닉스는 지난해 CMP 공정에 쓰이는 연마제인 CMP 슬러리를 동진쎄미켐으로부터 공급받았다. 기존에는 솔브레인을 솔벤더로 삼았지만 HBM 생산량이 늘며 이에 대응하고 불확실성을 낮추고자 멀티벤더로 변경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솔브레인이 SK하이닉스에 원재료 납품을 중단하는 등 행보를 보이지는 않았다. 공급망 다변화는 SK하이닉스를 막론하고 전 세계 모든 기업이 취하고 있는 당연한 전략이기 때문이다.한미반도체의 ‘을질’에는 기술경쟁력에 대한 자신감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SK하이닉스가 아니어도 잘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하지만 기업 경영의 입장에서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과연 옳은 판단일까 의문이 든다. 소송중인 한화세미텍을 듀얼벤더로 채택한 SK하이닉스에 도의적으로 감정이 상할 수는 있다. 내가 깐부라고 생각했던 친구가 나의 원수와 친해진다고 하면 기분이 나쁜 것처럼.하지만 이윤을 내고 지속가능한 경영을 이어가야 할 기업이 내일 다시 보지 않을 사람처럼 서비스 인력을 철수하고 가격 인상을 단행하는 한미반도체의 행보는 아쉽기만 하다. 마치 대규모 발주를 앞두고 행하는 기싸움처럼 보여진다. 만약 그들의 주장처럼 그간 SK하이닉스로부터 부당한 일을 당해왔다면 공정거래위원회 제소 등을 통해 해결할 수도 있다. 또한 합리적 원가 구조와 서비스 품질 확보를 위한 상호 협의 테이블을 마련할 수도 있다. 감정적으로 등을 돌릴 일이 아니라.링컨은 상대방에게 화가 날 때 편지를 쓰고, 이 편지를 태워버리면서 화가 난 감정을 같이 태워버렸다고 한다. 부정적 감정을 직접 쏟아붓는 것이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전 세계적으로 반도체 경쟁이 날로 격화하는 가운데 국내기업끼리 날을 세울 시간은 없다. 기업의 생존과 성장에는 파트너십이 핵심인 만큼 두 ‘깐부’가 이른 시일 내 갈등을 봉합할 수 있길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