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단위 제재 앞둔 은행권 "현 체계 유지 땐 생산적 금융 위축"신중론 금융위 "바젤 기준·대외 신인도 고려, 방향 정해진 것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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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융기관에 부과되는 과징금을 위험가중자산(RWA)에 언제, 어떻게 반영할지를 둘러싸고 금융당국과 은행권의 긴장감이 커지고 있다. 홍콩H지수 ELS(주가연계증권) 불완전판매, 주택담보대출비율(LTV) 정보교환 등 굵직한 제재 사안이 줄줄이 대기하는 가운데 은행들은 “조단위 과징금을 현 제도대로 반영하면 보통주자본비율(CET1) 방어를 위해 기업대출을 줄일 수밖에 없다”며 RWA 유예를 요구하고 있다. 

    반면 금융위원회는 “완화 방향으로 제도 손질을 검토 중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며 신중한 태도를 거두지 않고 있다.

    현재 체계에서는 금융회사가 과징금을 통보받는 순간부터 상당한 규모를 운영리스크로 평가해 장기간 RWA에 더하도록 돼 있다. 과징금이 이후 행정소송·민사소송을 거치며 감액되거나 취소될 수 있음에도 부과 시점부터 ‘확정된 위험’으로 간주해 자본규제에 묶어두는 구조다. 은행권이 “미확정 과징금을 곧바로 RWA로 잠그는 방식은 생산적 금융 여력을 훼손한다”고 주장하는 배경이다.

    신장수 금융위 은행과장은 28일 뉴데일리와의 통화에서 “금융회사 입장에서 과징금이 자본에 부담을 주니 여러 아이디어를 낼 수 있고, 그런 요구가 있다는 사실 정도는 인지하고 있다”면서도 “이를 완화하는 방향으로 구체적인 방안을 설계하거나 일정표를 짜놓고 검토하는 단계는 전혀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그는 “‘검토 중’이라고 표현되면 마치 방향성이 정해진 것처럼 받아들여질 수 있는데, 지금은 제도 구조를 들여다보는 수준일 뿐 완화 전제로 논의하는 상황은 아니다”고 강조했다.

    ◇“부과 시점 vs 확정 시점” 기준 논쟁 … 금융위는 “아직 방향 없다”

    은행권은 과징금의 RWA 반영 시점을 금융위 의결 시점이 아닌 법원 확정 시점으로 늦추는 방안을 비공식 채널을 통해 꾸준히 요구해왔다. 적어도 1심 판결 전까지는 RWA에 반영하지 말거나, 일부만 반영하는 ‘부분 인식’ 방안도 아이디어 차원에서 거론돼 왔다.

    신 과장은 이와 관련해 “과징금을 언제 확정 위험으로 볼지, 어느 단계에서 자본규제에 반영할지에 대해서는 시점 논쟁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라면서도 “국제적으로 뚜렷한 선례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해외 규제당국의 사례도 분명하지 않아 섣불리 방향을 정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체계보다 건전성 규제가 완화되는 방향으로 손을 대면 바젤 기준 이행 평가나 대외 신인도 측면에서 어떻게 비칠지까지 함께 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LTV·ELS 등 제재 겹치면 … 은행 “기업대출 50조원 줄어들 수 있다”

    은행들이 RWA 유예 논의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눈앞의 숫자 때문이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조만간 전원회의를 열고 KB국민·신한·하나·우리 등 4대 시중은행의 LTV 정보교환 행위에 대한 제재 수위를 확정할 예정이다. 공정위는 이들 은행이 LTV 관련 자료 7500여건을 사전에 주고받으며 대출 한도와 조건을 사실상 맞춰왔는지 여부를 들여다보고 있다.

    금융권 내부에서는 구체적인 시뮬레이션도 돌고 있다. 예를 들어 한 시중은행이 5000억원 규모의 과징금을 통보받는 경우, 운영리스크 산정 방식에 따라 향후 10년 동안 3조5000억원 안팎의 RWA 부담이 추가로 쌓일 수 있다는 분석이다. 은행이 CET1 비율을 14%대 중반 수준에서 유지한다는 가정 아래에서는 수조원대 위험가중자산을 줄여야 하고, 이를 상당 부분 기업대출로만 조정한다고 가정하면 10조원 넘는 대출 축소가 필요하다는 계산도 제시된다. 이 시나리오를 4대 은행 전체에 단순 확장하면, 기업대출 여력이 최대 50조원까지 줄어들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홍콩H지수 ELS 불완전판매 제재는 또 다른 변수다. 금융당국은 개정 금융소비자보호법상 과징금 규정을 토대로 연내 과징금 규모를 정리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시장에선 보수적인 과징률을 적용해도 전체 과징금이 1조원 안팎, 상단 시나리오에선 2조원, 일부에서는 4조원 이상까지 거론하는 등 전망이 엇갈린다. 과징금이 커질수록 장기간 추가되는 RWA도 가파르게 늘어나기 때문에 자본비율 방어를 위해 기업여신을 줄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은행권의 공통된 주장이다.

    ◇“RWA의 90%는 신용리스크 … 과징금 비중은 5% 안팎”

    금융위는 다만 은행권이 내놓는 ‘자본위기 시나리오’를 그대로 받아들이긴 어렵다는 입장이다. 신 과장은 “위험가중자산의 대부분(약 90%)은 대출·투자에서 발생하는 신용리스크가 차지하고, 운용리스크 몫은 전체의 5% 정도 되는 것으로 안다”며 “그 운용리스크 안에서도 여러 항목 중 하나가 과징금·벌금 관련 항목이기 때문에 그 부분의 영향만 과도하게 확대해 보는 시각은 경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과징금이 RWA에 미치는 영향이 크냐 작으냐, 은행이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이냐를 금융당국이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며 “자기 자본계획과 포트폴리오 조정을 어떻게 가져갈지는 개별 은행이 판단하고 책임져야 할 문제”라고 했다.

    은행들이 “과징금을 그대로 RWA에 반영하면 생산적 금융 여력이 훼손된다”고 호소하는 데 대해선 “잘못을 했으면 그에 상응하는 제재와 비용을 부담하는 것이 원칙”이라며 “과징금 부담이 크다면 위험도가 높은 영업을 줄이고 건전한 구조로 바꾸는 것이 우선이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사실상 “제재 회피 논리로 생산적 금융을 내세워선 안 된다”는 취지의 경고로 읽힌다.

    ◇생산적 금융 vs 규율 강화 … ‘유예 방안’ 설계가 시험대

    RWA 구조 자체도 긴장 요인이다. 대체로 담보가 확실한 주택담보대출에는 낮은 위험가중치가 부여되는 반면, 일반 기업대출에는 이보다 높은 비율이 적용된다. 같은 1조원 대출이라도 기업여신이 주택담보대출보다 규제자본을 더 많이 잠식하는 구조인 만큼 RWA를 줄여야 할 때 은행이 기업대출부터 조정하는 것은 구조적으로 자연스러운 선택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정부는 그동안 첨단산업·벤처·스타트업 등 성장 부문으로 자금이 흘러가도록 하는 ‘생산적 금융’ 확대를 금융정책의 간판 기조로 내세워 왔다. 하지만 미확정 과징금까지 현행처럼 곧바로 RWA에 반영하는 체계가 유지되면, 은행들이 위험가중치가 높은 기업여신 대신 상대적으로 안전한 자산으로 포트폴리오를 옮기려는 유인이 커질 수 있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신 과장은 “제재 강도를 높이고 금융소비자 보호 기준을 엄격히 적용해야 한다는 큰 방향에는 이견이 없다”면서도 “확정되지 않은 과징금을 장기간 RWA에 묶어둘 경우 자본비율 변동성이 커지고 실물경제로 흘러가는 자금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문제 제기도 이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만 “국제 기준과 대외 신인도를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제도 손질 여지가 있는지, 있다면 어느 수준까지 허용할 수 있을지부터 따져봐야 한다”며 “올해 안에 구체적인 방향이나 방안을 내놓을 수 있다고 보기에는 시기상 이르다”고 선을 그었다.

    결국 과징금의 RWA 반영 시점과 방식은 ‘규율 강화’와 ‘생산적 금융 확대’라는 두 목표 사이에서 금융당국과 은행권의 균형감각을 시험하는 잣대가 될 전망이다. 향후 금융위가 어떤 방식의 유예·조정안을 꺼내 들지에 따라 조단위 과징금 시대 은행권의 자본정책, 기업대출 여력, 국내 감독체계에 대한 시장 신뢰도까지 한꺼번에 재조정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