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탄핵·내란 정국 후유증, 금융에 '정치 리스크 상수' 남겨금융계급제·포용금융 명분 속 가격·심사 원칙 깨져, 도덕적 해이 우려국민성장펀드·새도약기금·상생기금까지 … '제 2재정'된 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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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재명 대통령ⓒ대통령실통신사진기자단/뉴시스
계엄 선포 이후 1년, 한국 금융·자본시장은 정권 교체와 내란 공방, 급등한 환율과 외국인 순매도가 겹치며 ‘사천피’ 이후에도 쉽게 흔들리는 ‘유리그릇 장세’ 위에 놓여 있다. 이재명 정부는 금융계급제 해소와 포용금융을 내세워 금리·대출 규제를 확대하는 동시에 국민성장펀드·새도약기금·상생기금 등 대형 프로젝트에 은행 자금을 동원하며 금융을 점차 ‘제2의 재정’이자 정책 집행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감독당국의 시선마저 산업금융·경쟁력보다 소비자 보호와 징벌적 제재에 쏠리면서, 가격·심사 원칙과 자본 배분이 정치·정책 변수에 좌우된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계엄 1년을 계기로 이런 흐름이 금융시스템 신뢰와 자본시장 안정성, 한국 경제의 중장기 체력에 어떤 부담으로 돌아올지 점검해본다. [편집자 주]계엄 선포에서 대통령 탄핵, 내란 재판 공방으로 이어진 지난 1년은 한국 금융에 ‘정치 리스크 상시화’라는 깊은 흔적을 남겼다.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금융정책은 ‘금융계급제 해소’ ‘상생·포용금융’ 구호를 앞세워 빠르게 움직이고 있지만, 그 과정에서 금리와 대출 심사를 움직이는 시장 원리는 후퇴하고 있다는 지적이 거세다.신용등급과 담보 수준에 따라 가격이 결정되는 기본 원칙은 흔들리고, 은행 자금은 국민성장펀드·새도약기금·각종 상생기금 등 정부 프로젝트에 종속되는 구조로 변하고 있다. 금융당국의 관심 역시 금융산업 경쟁력·산업금융보다는 소비자 보호와 제재 강화에 쏠리면서 금융산업 경쟁력과 산업 금융 역할은 뒷전으로 밀려났다는 비판이 거세다.◇계엄·탄핵·내란 정국, 금융에 남긴 건 ‘정치 리스크 상수’지난해 12월 3일 비상계엄 선포로 촉발된 정치 격랑은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인용과 정권 교체, 내란·특검 수사로 이어졌다. 형식상 계엄 정국은 끝났지만, 금융권에 남은 것은 “언제든 규제와 정책이 정치 일정에 따라 뒤집힐 수 있다”는 불신이다.이재명 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금융을 핵심 정치 아젠다로 끌어올렸다. 이 대통령이 “가난한 사람이 더 비싼 이자를 내는 금융계급제를 깨야 한다”며 금융개혁을 압박하자, 대출금리 부담 완화·채무 조정·저신용자 지원·법정 최고금리 인하·가산금리 규제 등 굵직한 과제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여기에 7년 이상·5000만원 이하 장기 연체채권 16조4000억원을 순차적으로 정리하는 ‘새도약기금’ 방식의 배드뱅크, 150조원 규모 국민성장펀드, 금융권 상생기금과 각종 특별 출연까지 더해지면서 은행과 금융사는 사실상 ‘보조 재정’ 역할을 떠맡게 됐다.정권이 바뀔 때마다 금융 규제 방향과 역할이 크게 출렁였던 과거와 비교해도, 이번에는 계엄·탄핵·내란이라는 정치적 충격 위에 포퓰리즘 성격의 금융 실험까지 겹쳐졌다는 점에서 리스크 강도가 다르다는 평가가 나온다. 그 결과 금융회사 경영의 기준점은 중장기 투자·해외 진출 전략에서 “이번 정권 5년을 어떻게 버티느냐”를 따지는 방어적 리스크 관리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이 금융권의 지배적인 시각이다.◇‘약자 보호’ 구호 아래 금리·심사 원칙 흔들려이재명 대통령이 취임 이후 저신용자 대상 고금리 상품을 ‘잔인한 금리’로 규정하고, “고신용자 금리를 올려 저신용자를 돕는 방식”까지 거론하면서 시장에는 “정책 기조에 맞는 가격 구조를 맞추라”는 강한 신호가 전달됐다. 정치권에서 가산금리 규제, 법정 최고금리 추가 인하 등 ‘가격 개입’ 카드를 잇달아 꺼내 들고 있는 배경이다.현장의 변화는 이미 수치로 나타나고 있다. 일부 시중은행의 신용한도대출(마이너스통장) 신규 취급 통계를 보면, 최저 신용점수 구간(600점 이하) 차주에게 적용된 금리가 최고 신용등급(950점 이상)보다 낮게 나타난 사례가 보고된다. 정책성 생활안정자금, 특정 계층 지원 대출 등에서 정부가 사실상 금리 상한선을 제시하고, 은행이 그 범위 안에서 상품을 설계한 결과라는 게 은행권 설명이다.신용평가는 소득·자산 규모만이 아니라 연체 이력, 부채 수준, 거래 기간, 카드·대출 이용 패턴 등 ‘상환 성실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그럼에도 정책에 따른 ‘예외 금리’ 구간이 넓어지면 “성실 상환자가 역차별을 받는다”는 인식이 커질 수밖에 없다. 실제 NICE평가정보 통계에서도 일부 구간(600~700점)의 평균소득이 상위 등급보다 더 높은 등, ‘고소득=고신용’ 공식이 깨진 사례가 확인된 바 있다. 신용위험에 따라 가격이 달라지는 대신 정책 목적에 따라 역전 현상이 생길 여지가 그만큼 커졌다는 의미다.장기 연체채권을 대규모로 정리하는 배드뱅크 정책은 도덕적 해이와 신용 질서 훼손 가능성을 동시에 안고 있다. 국회 검토보고서와 학계에서는 “연체 이력이 있는 차주만 혜택을 보면 성실 상환자의 상대적 박탈감이 커지고, ‘버티면 결국 국가가 해결해준다’는 신호를 줄 수 있다”는 지적이 이어진다.실제 시장 지표도 빠르게 변하고 있다. 카드대출과 인터넷전문은행 2030 청년층 신용대출 연체율은 가파르게 오르고 있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이른바 ‘배드뱅크 브로커’가 연체·채무조정을 미끼로 한 광고를 뿌리고 있다. 채무조정 대행을 명목으로 고수수료를 요구하거나, 대출 사용처를 허위로 기재하도록 유도하는 행위도 적지 않다는 것이 금융권의 전언이다. 신용질서와 법치에 동시에 균열을 낼 수 있는 위험 신호다.그럼에도 정치권은 법정 최고금리 인하, 횡재세 성격의 상생금융 기여금 도입 등 추가 개입 수단을 열어둔 상태다. 취약계층 이자부담을 덜겠다는 명분은 분명하지만, 가격과 심사 원칙을 잇따라 예외 처리할 경우 금융시스템 전반에 대한 신뢰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온다.박형중 우리은행 이코노미스트는 “금리를 계층별로 다르게 설계하는 방식은 시장 원리에 따른 리스크 관리 체계를 약화시켜 결국 부작용이 커질 수 있다”며 “금리는 차주의 신용위험·부도확률·자본비용을 반영해 결정되는데, 이를 행정적으로 바꾸면 은행은 자연스럽게 심사를 더 보수적으로 가져가고 가장 취약한 계층부터 대출 문턱 밖으로 밀어낼 수 있다”고 말했다.정책 개입 방식과 관련해서도 그는 “그 부작용을 막겠다며 정책이 더 깊게 개입하면 관치금융과 금융기관 도덕적 해이가 동시에 커질 수 있다”며 “국내 금융기관이 이런 정치·정책 압력을 흡수하면서도 자율성과 책임 경영을 유지할 만큼 충분히 성숙했는지 냉정한 점검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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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을 ‘제2의 재정’으로 … 산업금융·경쟁력 논의는 실종은행 자금 흐름은 이미 정부 프로젝트와 관치금융의 영향권 안으로 깊숙이 들어왔다. AI·반도체 등 첨단산업을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추진되는 150조원 규모 국민성장펀드 가운데 절반인 75조원은 민간 자금이다. 이 중 상당 부분을 금융권이 5년간 분담하는 구상이 거론된다.연체채권 정리를 위한 새도약기금에는 수천억원대 재정 투입과 함께 금융권 분담분이 추가로 들어간다. 여기에 보이스피싱 피해 전액 보상, 각종 상생기금·정책기금 출연, 보험·증권사까지 확대된 상생금융 요구가 더해지면서 은행은 본업인 여·수신과 자산관리 외에 ‘정책 집행 창구’ 역할까지 떠안고 있다.세금·규제 부담도 커지는 방향이다. 은행 수익 1조원 초과분에 부과되는 교육세율은 0.5%에서 1%로 두 배 인상됐다. 4대 은행 기준으로 연간 수천억원대 추가 부담이 발생할 것이라는 추정이 나온다. 동시에 국회에서는 지급준비금, 예금보험료, 각종 보증기금 출연금 등 법정 비용을 가산금리에 반영하지 못하도록 하는 은행법 개정안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비용을 금리에 전가할 통로는 막으면서 출연·세부담은 늘리는 구조다. 은행 입장에선 고위험 차주 대출 축소, 우대금리 축소, 각종 수수료 인상 등 다른 경로로 보정을 시도할 유인이 커질 수밖에 없다.규제·제재 리스크도 겹친다. 홍콩H지수 주가연계증권(ELS) 불완전판매, 주택담보대출 담보인정비율(LTV) 담합, 국고채 담합 의혹 등과 관련한 과징금 부과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 있다. 과징금은 단순 영업비용이 아니라 바젤 규제상 10년간 위험가중자산(RWA)으로 인식돼 자본비율을 직접 압박한다. 수조원대 과징금이 현실화될 경우 은행의 대출 여력 축소, 유상증자·후순위채 발행 부담, 배당·자사주 소각 축소 등으로 이어져 은행 기초체력이 약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그럼에도 금융당국의 메시지는 금융산업 경쟁력 강화보다 소비자 보호와 징벌적 제재 강화에 더 많이 할애돼 있다. 금융감독원은 ELS 재발 방지, 보이스피싱 배상 의무 확대, 고금리·고수수료 상품 규제 등을 연이어 예고하며 강경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반면 글로벌 금융사와의 경쟁 전략, 해외·신사업 진출, 규제 합리화 등 금융산업 발전 어젠다는 뒷순위로 밀려 있는 분위기다. 금융을 성장산업이 아니라 규제·통제의 대상으로 보는 시각이 고착될 수 있다는 지점이 시장의 가장 큰 걱정이다.국제 자본시장도 이런 변화를 그대로 지켜보고 있다. 글로벌 투자은행들은 최근 한국을 찾아 관치금융 강화, 준조세 확대, 채무탕감 정책 지속 가능성 등을 직접 점검하고 있다. 고환율과 국채금리 상승, 외국인 매도 확대가 맞물리면서 “정책 불확실성과 포퓰리즘 리스크가 자본유출 압력을 키우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경제·학계는 “재정 여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금융을 통해 정책 목표를 보완하려는 시도 자체는 이해할 수 있지만, 금융산업의 자율성과 건전성을 훼손하는 수준까지 가면 결국 그 비용은 서민·기업·미래 세대가 나눠 떠안게 된다”고 입을 모은다. 취약계층을 돕는 포용금융이 필요하다면, 금리를 행정적으로 왜곡하기보다 위험 분담 구조를 투명하게 설계하고 예측 가능한 규칙을 세우는 방향으로 재설계해야 한다는 주문이다.계엄 1년, 정치 일정은 눈앞의 고비를 넘긴 모양새지만 금융만큼은 여전히 선거 구호와 ‘약자 보호’ 레토릭의 영향권에 있다. 금융정책의 기준을 다시 경제 논리와 시장 원칙으로 되돌리지 못한다면, 경쟁력 약화와 시장 기형화의 대가는 결국 한국 경제 전체가 장기간에 걸쳐 부담해야 할 숙제로 돌아올 가능성이 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