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 대신 문자로, 6시 넘어서 일하지 말라"

  • 저금리, 저성장이 이어지면서 보험회사의 경영난이 심해지는 가운데 메리츠화재 김용범 신임 사장의 행보가 주목받고 있다.

    지난해 말 메리츠종금증권에서 메리츠화재로 오자마자 '구조조정' 카드를 꺼냈다는 비난의 여론도 있지만, 내부에서는 오히려 '좋아졌다'는 목소리다. 이와 함께 업계 경영진들이 긴장하며 지켜보고 있다는 후문이다.

    김용범 사장이 짚어낸 기존 메리츠화재의 가장 큰 문제점은 만연화된 야근으로 떨어진 업무집중도와 보고서에 쏟는 시간이었다.

    우선 습관성 야근을 없앴다. 최근에는 오후 6시30분 이후 회사에 남아 있는 임직원이 거의 없다. 가족들과 저녁을 함께 하는 삶을 돌려줘 일하는 사람이 즐거워야 한다는 것이 김용범 사장의 생각이다.

    처음 김용범 사장의 야근하지 말라는 지시에 "매일 야근해도 일이 넘쳤는데 6시 퇴근하면서 업무처리를 제대로할 수 있을까" 하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일찍 퇴근하라는 지시에도 조직이 움직이지 않자, 김용범 사장은 "골치 아파하는 모든 것을 없앨 것"이라며 보고서를 없앴다. 

    이제 문자로 즉시 보고하고 바로 결재받는다. 간단한 보고는 문자로 보고한 후 '진행하세요'라고 답변받으면 끝. 분량이 많은 내용은 이메일로 보내고, 부득이 한 경우 A4 1장에 담아 결재받는다.

    이전 대면결재 시스템에서는 최종 결정자까지 올라가는 모든 단계에서 시간이 허비됐다. 보고서 표지를 예쁘게 꾸미는 것은 물론  20~30장이 되는 분량을 작성해 결제를 받아야 했다. 보고서를 작성하는 시간도 많이 소요되지만, 결제를 받아야 하는 상사의 일정에 맞추기 위해 몇시간을 기다리기가 일쑤였다.

    결재방법 뿐 아니라 과정도 완전히 달라졌다. 실무자가 생각하는 최선의 제안의 보고가 그대로 최고 결정권자에게 보여지는 것.

    이전 방식에서는 'A, B, C 방법 중 A가 최선이며 B와 C라는 차선책도 있다'라는 식의 여지를 남기는 보고설를 작성했으며, 선임의 결재과정에서 의견이 추가되면서 변경되는 경우가 많았다. 최종 결정되는 내용은 실무자가 제안했던 A로 채택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

    이제 실무자가 차선책을 만드는 과정, 선임자들의 의견을 추가하는 과정을 모두 없앴다. 실무자가 'A의 방법이 최선이다'라는 보고를 올리면 선임은 '통과' 여부만을 결정한다. 의문이 생기면 논의한 후 '통과' 여부를 결정한다.

     

    김용범 사장은 "현장에 있는 사람이 가장 전문가다. 스스로가 날 설득할 수 있는 제안을 해라"고 누누이 말한다.

  • ▲ 메리츠화재 김용범 사장
    ▲ 메리츠화재 김용범 사장

    허비하는 시간이 조금씩 줄다보니 지금은 6시 퇴근이 가능해 졌다. 단, 업무준비를 위해 출근시간은 전체적으로 30분 빨리졌다.

    메리츠화재의 한 직원은 "출근시간은 30분 빨라졌지만, 퇴근시간은 3~5시간 앞당겨졌다. 저녁 늦게 집에들어가면 피로감도 쌓였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빨리 업무를 마무리해야 하기 때문에 직원들과 잡담하는 시간도 줄어들고 업무집중도도 높아졌다. 상대적으로 업무강도가 세졌다고 할 수 있지만, 이에 대해 만족해 하는 직원들도 많다"고 말했다.

    업무효율성을 높이다 보니 이른바 '월급도둑'은 불안해 하는 분위기다.

    선임을 거쳐 보고되는 시스템이 아닌 본인의 일을 직접 보고하다 보니, 전문성을 갖추지 못하거나 그동안 특별한 업무 없이 후임들에게 시키기만 했던 직원들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기존에는 직속 상사나 후임만 알 수 있던 분위기를 임직원 전체가 알게됐다.

    김용범 사장은 '일할 수밖에 없는' 효율화 시스템을 만들어 놓고 '희망퇴직'을 실시했다. 일반적으로 비용절감을 위해 근속연차 20년 이상, 부장급 이상 등의 조건이 붙은 희망퇴직과는 뭔가 달랐다.

    메리츠화재는 근속연차와 직급에 상관 없이 모든 직급을 대상으로 희망퇴직을 실시하고 있다. 인원도 정해지지 않았다. 무조건적인 인원감축이 아니라 일 하는 사람은 남고 그렇지 않으면 나가라는 김용범 사장의 뜻으로 보인다. 

     

    사원, 대리, 과장, 부장 등 지위를 막론하고 일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무려 3년치의 연봉을 쥐어주며 스스로 나갈 수 있도록 유도한 것. '비용절감'보다는 '효율화'에 초점을 맞췄다.

    김용범 사장의 방식이 알려지자 업계는 긴장하는 분위기다.

     

    보험업계 경영진들은 김용범 사장이 중하위권이었던 메리츠종급증권을 3위로 올려놓은 신화를 쓴 것처럼, 메리츠화재도 성공시킬 수 있을 지 주목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일부 보험사 경영진은 인사팀 등을 통해 메리츠화재 관련 스크랩을 요구하며 김용범 사장을 주시하고 있다"고 했다.

    한편 메리츠화재는 오는 9일 희망퇴직 인원을 확정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