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은행 정체성 명확히 하자"... '커밍아웃' 임박 회사채 주관-M&A 자문-PEF 등 민간 시장마찰 영역 축소 '촉각'
  • ▲ '떼었다 붙였다'유난히 액운이 많은 산업은행의 구조조정에 다시금 관심이 쏠리고 있다ⓒ뉴데일리 DB
    ▲ '떼었다 붙였다'유난히 액운이 많은 산업은행의 구조조정에 다시금 관심이 쏠리고 있다ⓒ뉴데일리 DB

     

    산업은행의 커밍아웃이 임박했다. 국책 산업은행으로 남을 것인지, 민간 상업은행으로 탈바꿈할 것인지 그 정체성을 명확히 가르자는 움직임이다.

    내달초 종합 발표를 앞둔 정부의 정책금융기관 구조조정 방안에서는 '산업은행'의 역할 재편방안이 핵심이 될 전망이다. 당장 은행 내부에서는 회사채 주관, M&A 자문, PEF 등 민간부문과의 시장마찰 영역 축소 소식에 설왕설래가 한창이다.

    태생부터 정책금융기관이라는 '숙명'을 달고 나온 산업은행은 늘 수익 보다 정책금융의 역할에 충실해야하는 특수성이 있다. 시중은행이 기업금융 보다 소매금융에 치중하면서 그 비중은 나날이 커졌고 시장 실패 영역이나 위기 기업들을 지원하다보니 매번 리스크 관리와 사후관리 논란이 불거졌다.

    굵직굵직한 대기업 부실이나 기업구조조정 실패의 중심에는 산업은행이 있었고 그 피해는 은행의 건전성 위협과 정체성 논란으로 다가왔다.

    대표적인 사례가 대우조선해양이다. 최대주주인 산업은행은 매각 시기를 놓쳐고 수조원대의 부실 가능성을 인지하지 못하면서 도마 위에 올랐고 급기야 지난 2분기 3조원대의 영업손실을 발표함에 따라 당장 1조원 이상의 증자가 필요한 상황이다. 여론의 뭇매를 맞았고 정책금융기관 구조조정의 시발탄이 됐다.

     

  • ▲ 산업은행을 곤경에 빠트린 대우조선해양. 두고두고 KDB에는 족쇄가 될 전망이다.ⓒ
    ▲ 산업은행을 곤경에 빠트린 대우조선해양. 두고두고 KDB에는 족쇄가 될 전망이다.ⓒ

     

    9월 현재 산업은행의 자회사·지배회사는 무려 268곳에 달한다. 산은이 15% 이상 지분을 보유한 회사들이다. 이 중 구조조정 중인 부실기업 수만도 118개에 달하고 보유 부실여신 잔액은 3조가 넘는다. 상당수가 부실징후가 나타나 시중은행에서 외면받다 보니 산업은행으로부터 자금수혈을 받았고 여전히 상황이 호전되지 않으면서 산업은행의 관리를 받게 된 기업들이다.

    금융당국은 제2 대우조선해양 사태 되풀이를 막고 산업은행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우선 118곳의 비금융 자회사를 3년내 순차적으로 시장에 매각한다는 방침이다. 조만간 발표될 정책금융기관 역할 재정립 방안에 이같은 내용이 포함된다. 부실기업 처리문제를 놓고 골머리를 앓는 대신 투자금융 중심의 산업은행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도록 만들자는 방안이다.

    산은이 직접 관리하거나 채권단과 공동관리하는 곳 중 18곳이 우선 매각 대상이 된다. 대우증권과 KDB생명을 필두로 STX엔진, STX조선해양, STX중공업, 국제종합기계, 넥솔론, 동부제철, 아진피앤피, 오리엔탈정공, 원일티엔아이, STX, 켐스, 코스모텍, 한국지엠, 한국항공우주산업, 현대시멘트 등이 매물로 나올 예정이다.

    그러나 118개 부실기업 매각은 상당부분 부풀려져 있다. 산업은행이 실제 1대 주주로서 매각권을 행사할 수 있는 곳은 대우조선해양과 방산업체인 KAI, 한국GM 정도에 불과하다.

    나머지 업체는 워크아웃 상태이거나 공동 채권단이 존재하는 형편으로 산업은행의 일방적인 결정이 불가능하다. 더욱이 대부분 업체에 대한 산업은행 투자규모는 2억~3억원 수준에 불과해 밖으로 알려진 것과 사뭇 차이가 있다.

     

  • ▲ 산업은행을 곤경에 빠트린 대우조선해양. 두고두고 KDB에는 족쇄가 될 전망이다.ⓒ

     

    산은이 맡았던 기업구정기능은 유암코 등으로 점진적으로 이관한다. 대신 산업은행은 미래산업과 중견기업의 금융지원에 집중하게 된다.

    구정한 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최근 정책금융 역할 세미나에서 중소기업 대출은 늘었지만 정책금융 지원 효율성은 오히려 낮아졌다고 지적하며 산은 등의 역할 재편을 주문했다.

    중소기업 보다는 중견기업에 직접적인 투·융자 등 복합금융을 지원해 이들 기업이 정체되지 않고 지속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주는 요구다. 회사채 주관, M&A 자문, PEF 등 민간부문과의 시장마찰 영역은 산은의 역할을 축소하고 기능을 탄력적으로 조정할 것도 제시했다.

    금융위에서도 이같은 방안에 궤를 같이하고 있다. 금융위 관계자는 "정책금융기관들은 과거와 달리 이제는 자금을 '잘' 공급하는 것이 중요하고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 민간이 들어오면 이를 버리고 다시 새로운 영역을 만들어야 하는 어려운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산업은행이 대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제 역할을 못 한 것은 정체성 혼란 때문"이라며 "산업발전을 지원해야 하는 국책은행과 리스크 관리에 신경 써야 하는 상업은행 사이에서 뚜렷한 입장 정리를 못 했다"고 지적했다.

    금융위에서는 정책금융기관의 맏형 격인 산업은행에게 중소기업은 넘어섰지만, 대기업 집단에 포함되기에는 다소 부족한 중견기업을 맡길 생각이다. 이미 기업규모가 갖춰진만큼 산업은행이 직접 투자를 하거나 일정 규모의 자금을 빌려주면서 기업성장이 정체가 되지 않도록 돕겠다는 취지다.

     

  • ▲ 회사채-M&A-PEF 등 민간 마찰영역 축소 소식에 관련 직원들은 일손을 잡지 못하고 있다@뉴데일리 DB
    ▲ 회사채-M&A-PEF 등 민간 마찰영역 축소 소식에 관련 직원들은 일손을 잡지 못하고 있다@뉴데일리 DB


    문제는 회사채나 M&A 시장 등이 활성화되지 못한 상황에서 산은의 일방적인 역할 축소에 대한 우려다. 이 문제가 처음으로 불거진 10여년전에는 해당 시장이 호황을 맞으면서 플레이어가 넘쳐났던 적이 있다. 그러나 시장 침체로 다시금 산은이 등장했고 벤처 프론티어 역할을 대신해줄 곳도 마땅치가 않은 형편이다. 기왕에 벌여놓은 PEF를 단박에 중단하는 일은 더더욱 말이 되질 않는다. 속도조절이 필요한 이유다.

     

    일각에서는 아예 이참에 산업은행을 민영화하자는 주장까지 다시 제기되고 있다.

    오정근 건국대 금융IT학과 특임교수는 최근 한 토론회에서 산업은행 민영화에 관해 "인수합병·구조조정 부문과 KDB대우증권을 통합해 민간 투자은행으로 재탄생시키고, 나머지 상업은행 업무는 그대로 떼어내 완전한 상업은행으로 독립시켜야 한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정권때 마다 논란을 빚었던 터라 다시금 민영화로의 회귀는 기대하기 어렵다.

    산업은행의 정책금융은 과거 산업자금 공급의 첨병으로 경제성장에 일정부분 기여해 왔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하지만 최근에는 상업기관과의 업무 중첩과 정책금융기관간의 기능 중복, 좀비기업에 대한 자금 지원에 따른 금융시장 왜곡 등의 비판에 시달리고 있다. 그래서 금융환경 변화에 따른 산업은행의 역할을 다시금 바꿔보자는 움직임은 여러가지 논란에도 불구하고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10여일 뒤 발표될 정책금융기관 구조조정 방안이 유독 '붙였다 떼었다' 액운이 많았던 산업은행의 정체성과 위상에 또 어떤 변화를 초래할 지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