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사 책임 외면하는 반복 매각, 연체자는 끝없는 추심 고통대법 판례·금융위 정책 동시 전환 … "회수 중심 관행 바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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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환 가능성은 없는데 추심은 계속된다."
    연체채권을 둘러싼 현장에서는 이런 상황이 비일비재하다. 채권이 반복적으로 매각되는 동안 채무자는 점점 더 강한 추심에 노출되고, 소멸시효는 금융사의 지급명령 한 장으로 손쉽게 연장된다. 이러한 관행에 대해 대법원과 금융당국이 동시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29일 금융위원회 주관으로 열린 ‘개인 연체채권 관리 현장 간담회’에서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는 '은행 → 저축은행 → 자산관리회사 → 대형 추심사 → 소형 추심사'로 이어지는 반복 매각 구조의 문제를 지적했다.

    캠코 측은 “금융회사는 매각을 통해 고객 보호 책임에서는 벗어나면서 회수 가치는 극대화한다”고 꼬집었다. 문제는 채권이 매각될수록 추심 강도가 높아진다는 점이다. 갚기 어려운 채무자일수록 더 강한 추심을 받는 역설적 상황이 만들어진다.

    ◇추심보다 중요한 건 정보 … “채무자의 현재를 알아야 한다”

    김문주 변호사는 간담회에서 “금융회사가 채무자의 실직 여부나 질병, 소득 감소 같은 현실을 파악하기 어렵다”며 “채무조정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관계부처와의 정보 연계가 필수”라고 강조했다.

    그는 국세청 소득자료, 복지부 사회보장 정보, 고용부 고용보험 이력 등을 금융회사와 연계해, 채무자의 상환능력을 평가할 수 있는 인프라를 마련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지금의 제도는 환자에게 약도 처방 없이 추심부터 시작하는 격”이라는 게 현장의 목소리다.

    ◇대법 “일부 갚았다고 시효 포기 아냐” … 58년 만에 판례 뒤집혀

    간담회에서는 대법원의 판례 변경도 중요한 화두였다. 지난 24일 대법원은 1967년 이후 유지된 기존 입장을 공식 번복했다. 이전까지는 채무자가 소멸시효 완성 후 일부 상환하면 자동으로 시효 이익을 포기한 것으로 추정했지만, 이제는 "채무자가 시효 완성을 인식하고, 그 이익을 명시적으로 포기했는지"를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동진 서울대 교수는 “이번 판결은 채무자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던 일률적 추정 법리를 폐기하고, 사안별 판단을 가능케 한 전환점”이라며 “제도 역시 이 방향으로 개선돼야 한다”고 말했다.

    ◇금융위 ‘회수 중심 관행’에서 '재기' 중심 전환 예고

    권대영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은 간담회 모두발언에서 “실업이나 질병 등 예기치 못한 사유로 인해 채무불이행에 이른 이들에게 무한 책임을 묻는 것은 과도하다”며 “채무자는 단순한 추심 대상이 아니라 회복을 지원해야 할 제도적 보호 대상”이라고 강조했다.

    현 제도는 대출 → 연체 → 상각 → 매각 → 지급명령 → 시효 연장의 반복 구조 위에 놓여 있다. 채권은 상각 처리돼 세제 혜택을 받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매각되고 추심되며, 시효는 지급명령을 통해 5년, 10년, 15년 이상으로 연장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금융사는 실질적인 회수 부담은 지지 않으면서 법적 절차만 밟는 구조다.

    이날 간담회에서는 채권 매각 횟수 제한, 원채권자의 사후 책임 유지를 비롯해 국세청·복지부·고용부와 금융사 간 실시간 정보 공유, 지급명령 통한 무분별한 연장 차단, 시효 완성 채권 매각·추심 금지, 금융사 자체 채무조정 역량 확대 및 의무화 법제 정비 등도 논의됐다.

    이 외에도 금융위는 공공부문 중심의 채무조정에서 벗어나 민간 금융회사의 적극적 참여와 책임 확대를 요구하고 있다.

    권 부위원장은 “채무자는 단순히 빚을 안 갚는 사람이 아니라, 상환 능력을 회복할 수 있는 잠재적 고객”이라며 “이제는 금융회사가 연체자에게도 책임 있게 대응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