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S·블랙록·메타는 초대형 AI 인프라 동맹국민성장펀드 한계, 지주–CVC 규제 손질 논쟁 가열대통령·기재부 "조건부 완화" vs 공정위 "최후의 수단"일반지주 투자전문회사·공동GP 허용 범위가 시험대
  • ▲ ⓒ챗GPT
    ▲ ⓒ챗GPT
    마이크로소프트·블랙록, 메타·사모펀드가 수십조원대 AI(인공지능) 인프라에 함께 투자하는 사이 한국은 43년간 유지돼 온 금산분리 규제를 둘러싸고 정부 내부에서 정면 충돌 양상을 보이고 있다. 대통령과 경제부처가 AI·반도체 등 전략산업 투자를 위해 금산분리의 “조건부 완화” 가능성을 시사한 직후 공정거래위원회가 “몇 개 기업 민원 때문에 수십년 된 틀을 바꿀 수 없다”며 강하게 제동을 걸면서다. 정책 신호가 엇갈리자 금융·산업계에서는 “규제 갈등으로 AI 투자 골든타임을 놓치는 것 아니냐”는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24일 업계에 따르면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달 샘 올트먼 오픈AI 최고경영자와의 면담에서 AI 분야에 한해 금산분리를 포함한 핵심 규제의 재검토 가능성을 언급했다. 이어 150조원 규모 국민성장펀드 국민보고대회에서도 “글로벌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으려면 신산업에 필요한 대규모 민간 자본을 끌어들일 수 있는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며 금산분리 완화 논의를 사실상 공식화했다.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도 지난 19일 기자간담회에서 “죽느냐 사느냐 하는 환경에서 규제를 무조건 유지하는 것이 반드시 선이라고 보긴 어렵다”고 전제한 뒤 “대규모 자본 조달이 꼭 필요하다면 금산분리의 근본 정신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관계부처와 논의할 수 있다”고 말했다. 150조원 국민성장펀드만으로는 AI·반도체·바이오 등 신산업의 조원대 자금 수요를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에 민간이 펀드 운용사(GP)를 설립해 국내외 자금을 모을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겠다는 취지로 읽힌다.

    하지만 사흘 뒤 나온 주병기 공정거래위원장의 메시지는 정반대였다. 주 위원장은 21일 취임 후 첫 기자간담회에서 “수십년 된 규제를 몇 개 회사의 민원 때문에 바꾸는 것은 옳지 않다”며 “금산분리 완화는 여러 대안 가운데 다른 방법이 없을 때 검토할 최후의 수단”이라고 못 박았다. 투자 활성화 필요성에는 공감한다면서도 “핵심은 투자 촉진이지 금산분리 완화가 아니다”, “규제 탓만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말해, 대통령실·경제부처와는 다른 기류를 분명히 했다.

    대한상공회의소가 건의한 일반지주회사의 자산운용사 소유 허용에 대해서도 “기업들이 투자회사를 만들어 손자회사를 늘리려는 것 같지 않다”며 부정적 입장을 밝혔다. 반도체 등 특정 산업에 한정해 예외를 두자는 제안에 대해서도 “기업은 본업에 충실해야 한다”고 선을 그었다. 대통령실과 경제부처가 “열어놓고 보겠다”는 메시지를 연이어 내놓는 상황에서 공정위가 사실상 브레이크를 건 셈이다.

    금산분리는 1982년 은행법 개정 과정에서 제도화된 이후 재벌의 금융계열사 사금고화와 산업 부실의 금융 전이를 막는 안전장치로 기능해왔다. 현행 체계에서 비금융주력자는 원칙적으로 은행 의결권 있는 주식을 4%까지만 행사할 수 있고, 금융당국 승인 아래서도 10% 이내로만 보유가 가능하다. 일반지주회사는 국내 금융·보험사를 자회사로 둘 수 없으며, 기업형 벤처캐피털(CVC)도 지분 100% 자회사 구조로만 허용되고 차입 한도는 자본총액의 200%로 제한된다. 공정위와 일부 학계, 시민단체는 “경제력 집중과 독과점 폐해가 여전히 심각한 상황에서 지주회사·금융 규율을 동시에 건드리는 완화는 신중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반면 산업계와 금융권에서는 금산분리가 신산업 자본조달의 병목으로 변했다는 불만이 쌓여 있다. AI 데이터센터, 첨단 반도체 공장, 전기차·배터리 밸류체인에 투입되는 규모는 이미 조원 단위를 넘어서는데 국내 대기업들은 지주회사 규제와 금산분리 원칙 탓에 글로벌 자본과 함께 초대형 펀드를 만들기 어렵다는 것이다. 

    한 시중은행 고위 관계자는 “세계 기업들은 조단위 달러를 펀드 구조로 조달해 인프라에 넣는데, 한국은 지주회사·금융 규제에 막혀 출발선에 제대로 서 보기도 힘든 형국”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해외에서는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이 결합한 대형 프로젝트가 잇따르고 있다. 블랙록이 주도하는 AI 인프라 파트너십 컨소시엄(AIP)에 마이크로소프트·엔비디아 등이 참여해 미국 데이터센터 운영사 얼라인드 데이터센터스를 약 400억달러에 인수하기로 한 거래가 대표적이다. 이 컨소시엄은 최대 1000억달러까지 투자 여력을 가진 AI 인프라 전용 플랫폼을 표방한다. 메타는 사모펀드 블루아울캐피털과 270억달러 규모의 합작 구조를 짜 루이지애나 ‘하이퍼리온’ 데이터센터 캠퍼스를 개발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이런 모델을 그대로 구현하기 어렵다. 공정거래법상 일반지주회사는 펀드 운용사를 자회사로 둘 수 없고, 금융회사는 비금융회사와 공동 운용사(Co-GP)를 세워 기업과 함께 펀드를 조성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알리바바의 전자상거래 데이터를 바탕으로 결제·대출·투자 플랫폼으로 성장한 알리페이, 애플과 골드만삭스가 협력한 애플카드 같은 ‘빅블러’ 모델도 현행 은산분리·여신전문금융업 규제 체계에선 도입이 가로막혀 있다는 것이 업계의 공통된 평가다.

    재계는 “게임의 룰이 바뀌었다”며 규제 재정비를 요구한다.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최근 여당과의 간담회에서 “글로벌 기업들이 조단위 달러를 투자하는 것도 기업 단독이 아니라 펀드를 만들어 외부 자금을 조달하는 방식”이라며 “우리도 그런 자금 조달이 가능하도록 제도를 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한상의는 일반지주회사에 한해 투자전문회사 소유를 허용하고, 금융회사와 기업의 공동 GP 설립을 인정해 달라고 정부에 공식 건의한 상태다.

    학계에서는 찬반이 교차한다. 한 경제학과 교수는 “우리나라에서 금산분리를 완화한다는 것은 결국 산업자본이 금융업에 더 깊게 진입하도록 문을 여는 것”이라며 “그동안 경쟁을 제한해온 진입장벽을 낮추는 효과와 동시에 재벌 구조·지배구조 현실을 감안하면 부작용 위험도 함께 커지는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산업자본이 가진 고객 정보를 금융과 결합하면 소비자 입장에서는 일종의 원스톱 서비스가 가능해져 편의와 선택지가 늘고, 자본 측면에서도 여러 산업에 분산투자가 이뤄져 위험을 나누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면서도 “같은 구조가 위기 상황에서는 실물과 금융을 동시에 흔드는 충격 전이 경로로 작동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특히 “재벌 영향력이 크고 지배구조가 여전히 불투명하다는 평가를 받는 한국에서는 이해상충과 연결대출(connected lending)을 얼마나 통제할 수 있는지가 핵심”이라며 “지금 논의는 이런 장단점을 종합적으로 따지는 것이라기보다 ‘대규모 자금이 필요하니 산업자본을 활용하자’는 식으로 흐르는 점이 우려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금산분리 완화를 검토한다면 새로운 플레이어가 은행의 책임 있는 소유주가 될 수 있는지, 감독·규제가 실제로 작동할 수 있는지를 먼저 따져봐야 한다”며 2006년 미국에서 월마트의 산업융자회사(ILC) 인수를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을 참고 사례로 제시했다.

    윤석헌 전 금융감독원장은 보다 직설적인 경고를 내놓는다. 윤 전 원장은 뉴데일리와 통화에서 일부 대기업이 CVC·지주회사 규제 완화를 앞세워 대형 프로젝트 자금조달 통로를 넓혀 달라고 요구하는 데 대해 “국내 굴지의 그룹이라면 채권이든 주식이든 자기 신용을 앞세워 자본시장에서 정공법으로 평가받고 자금을 조달하는 것이 우선”이라며 “위험이 큰 사업이라면 그 위험을 먼저 감당해야 할 주체는 재벌 자신이지, 복잡한 구조를 앞세워 사실상 국민 일반 투자자에게 위험을 먼저 넘기는 방향이어선 곤란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AI·반도체 투자가 필요하다는 데는 이견이 없지만, 그렇다고 금산분리를 손보는 것이 유일한 해법인 것처럼 포장해서는 안 된다”며 “필요하다면 기업이 신용을 걸고 들어가는 방식부터 검토해야 한다”고 했다. 이어 “규제 틀을 바꾸자는 요구가 특정 대기업 이해관계와 얼마나 얽혀 있는지, 그 부분을 시장과 국민에게 투명하게 설명할 책임이 있다”고 덧붙였다.

    정치권 기류는 이전보다 유연해지고 있다. 대통령과 경제부처가 전향적 검토 쪽으로 방향을 튼 만큼 여당 안팎에서는 금산분리 완화 범위와 방식을 둘러싼 실무 논의가 불가피하다는 인식이 확산하고 있다. 다만 특정 그룹 특혜 논란과 경제력 집중 우려를 의식해 속도조절론도 만만치 않다. 구윤철 부총리가 “당장 금산분리를 풀겠다는 단계는 아니다”라고 선을 그은 것도 이런 맥락이다.

    결국 관건은 금산분리라는 안전장치의 취지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조단위 민간 자본을 얼마나 신속하게 국가 전략산업으로 끌어들일 수 있느냐다. 금융·산업계에서는 “찬반 구호를 되풀이할 시간이 없다”며 구체적인 설계 논의로 빨리 넘어가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일반지주회사에 투자전문회사 소유를 허용하되 투자 대상과 레버리지에 엄격한 한도를 두는 방안, 신산업 인프라 펀드에 한정해 공동 GP를 허용하고 이해상충·연결대출을 강하게 규제하는 방안 등이 테이블에 오를 수 있다는 관측이다.

    한 정부 관계자는 “완화 여부를 놓고 평행선을 달리는 논쟁을 이어갈 것이 아니라, 어떤 범위·어떤 구조라면 금융안정과 혁신을 동시에 담보할 수 있을지에 대한 시나리오를 놓고 따져볼 시점”이라며 “AI·반도체 투자 경쟁이 국가 간 속도전으로 번진 상황에서 금산분리 논쟁이 부처 간 힘겨루기와 정쟁으로 소모된다면 그 비용은 결국 한국의 미래 성장산업과 일자리가 떠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