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자산운용사CEO 간담회업계 "가상자산 상품 허용해달라" 촉구이 금감원장, 취임후 "소비자보호" 강조 자산운용업계 요구 '시험대'
  • ▲ 이찬진 금감원장ⓒ연합
    ▲ 이찬진 금감원장ⓒ연합
    이찬진 금융감독원장이 취임 후 줄곧 강조해온 '소비자 보호' 철학이 시험대에 올랐다. 자산운용업계가 '비트코인 ETF' 허용을 촉구하면서다.

    18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이 금감원장은 전날 서울 여의도에서 '자산운용사 CEO 간담회'를 개최했다. 행사에서 자산운용사 CEO들은 "시장수요에 부응하기 위한 가상자산 상품 등이 시장에 출시될 수 있도록 정책적, 제도적 지원을 요청"했다.

    이같은 요청은 이 원장의 '소비자 보호' 철학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실제로 이 원장은 이같은 요청에 "오늘 간담회에서 업계가 제시한 다양한 의견을 향후 투자자보호 및 감독·검사업무에 충실하게 반영하겠다"고 답하면서 사실상 '선긋기'에 나섰다.

    간담회가 끝나고 가상자산 상품이 소비자 보호 취지에 적합하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이 원장은 "죄송합니다"라며 답변을 피했다. 

    만약 이 원장이 가상자산 ETF의 국내 출시를 허용할 경우 투자자들은 '초고위험' 상품에 노출될 우려가 있다. 최근 미국 증시에 상장된 가상자산 상품의 수익성이 이를 방증한다. 비트코인을 추종하는 BITO의 경우 최근 3개월 동안 무려 25.73%가 폭락했다. 이더리움을 2배 추종하는 ETHU의 경우 61.46%가 빠졌다.

    또한 금감원은 지난 14일 보도자료를 내고 '고위험 상품' 주의보를 내린 상태다. 보도자료에 따르면 한국 개인투자자들이 올해 1월부터 10월까지 해외 파생상품에 투자해 3735억 원의 손실을 본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5년간 해외 파생상품 투자 손실액은 무려 연평균 4500억 원에 육박한다.

    가상자산 상품 허용은 글로벌 추세지만 변동성이 높아 투자자들의 손실 위험도 높아진다. 최근 글로벌 기관투자자들조차 가상자산으로 인해 막대한 피해를 입은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하버드대 기금(HMC)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하버드대는 올해 3분기 비트코인 ETF 보유량을 3배 가까이 늘리며 적극적인 매수에 나섰으나, 최근 가격 급락으로 최소 14% 이상의 평가손실을 입은 것으로 추정된다. 세계 최고의 운용 인력을 보유한 대학 기금조차 '물타기' 끝에 손실을 보는 상황에서, 국내 개인 투자자들에게 빗장을 열어줄 경우 그 피해를 당국이 감당하기 어렵다는 게 금융당국의 입장으로 풀이된다. 

    이 원장이 이날 간담회에서 사용한 '비 새는 집'이라는 비유도 이 같은 맥락으로 풀이된다. 이 원장은 "비 새는 집 들보는 결국 썩는다"며 "설계·제조·판매 전 과정에서 투자자 최우선 원칙이 작동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기초자산으로서의 법적 성격이 모호하고 변동성이 극심한 상품을 허용하는 것은, 자칫 부실한 집을 짓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반면 업계의 불만은 고조되고 있다. 배재규 한국투자신탁운용 대표는 지난달 금융위원장에게 "미국 등 선진국에서 검증된 상품을 국내에서도 허용해야 한다"며 "출시가 늦어지면 개인 투자자들만 손해를 본다"고 작심 발언을 쏟아낸 바 있다. 

    실제로 미국은 비트코인 현물 ETF 운용 자산이 약 1500억 달러(약 200조원)에 육박하고, 퇴직연금(401k) 투자 제한까지 완화하는 등 제도권 안착에 속도를 내고 있다.

    그러나 국내 도입을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현행 자본시장법상 가상자산은 ETF의 기초자산인 금융투자상품, 통화, 원자재 어디에도 명확히 해당하지 않는다. 또한 은행 등 수탁 기관이 가상자산을 보관할 법적 근거가 없어 수탁 인프라 구축조차 요원한 실정이다.

    이 원장은 이날 "자산운용업계가 '돈을 굴려 돈만 버는' 금융이 아닌, 가계자산과 경제를 키우는 금융의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가상자산 상품 허용을 두고 '소비자 보호'와 '시장 육성' 사이에서 금융당국의 줄타기가 당분간 지속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