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할 수 없는 선택의 시간이 목전에 다가왔다.
올해말이면 장장 20여년을 끌어온 '쌀 관세화' 유예기간이 마침내 종료된다.
9월까지는 '현상유지'-'추가보류'-'개방'중 하나를 정해 WTO에 우리의 입장을 전달해야 한다.
더는 늦출 수도 미룰 수도 없는 마지노선이다.
이에 따라 정부는 20일 마지막 공청회를 열어 최종 의견을 수렴한 뒤 이달말 정부의 입장을 국회에 보고하기로 했다.
◇ 의무수입량 40만t...연간 3조 부담
지난 4월 9일 농림식품축산부와 산업통상자원부에선 옅은 한숨이 새어나왔다.필리핀이 제안한 쌀 개방 5년 유예 요청이 또다시 부결됐다는 소식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날아 들었다.
WTO 회원국 가운데 필리핀과 더불어 유이의 쌀 미개방국인 우리의 입장에선 결코 남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1994년과 2004년, 우리나라는 쌀 시장 개방 대신 두차례에 걸쳐 각각 10년씩 20여년간의 쌀 관세 유예 조치를 받았다.
식량주권과 농민들의 생존권은 물론 '쌀'에 대한 정서상 특수성을 감안한 조치였다.
하지만 공짜는 없는 대가는 혹독했다.
시장 개방을 미루는 대신 해마다 의무 수입량(MMA)를 늘려야 했다.
1995년 5만1천t으로 출발한 의무 쌀수입량은 올해는 40만9천t에 달한다. 국내 소비량의 9.7%에 해당하는 물량이다.
이렇게 20년간 쌀 의무 수입에 쏟아부은 비용은 3조 원, 남는 쌀 보관비도 해마다 수백억 원에 달한다.
더 큰 문제는 '한 번 더 유예'할 경우 떠안아할 부담이다.
유예기간은 5년에 불과하지만 의무 수입물량은 현재의 두 배인 80만t 이상으로 증가하게 된다.
쌀 자급률이 80%대로 추락한다. 자칫 한국 농업에서 쌀 산업이 없어질 정도로 어려워질 수 있다.
여기에 각종 부가 요구도 추가된다.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이다.
-
◇'현상유지'-'추가보류'-'개방' ...6월 결정
발등에 떨어진 불은 9월말까지 WTO에 쌀 관세화 여부를 통보해야 한다는 것이다.이때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카드는 △현상 유지 △웨이버(일시적 의무면제) 신청 △관세화 전환 등 세가지. 하지만 어느 하나 쉬운게 없다.
현재 정부는 관세화 전환에 무게 중심을 두고 있지만 여전한 농민단체들의 반발에 고민이 깊다.
△현상 유지(Stand Steel)개방도 안하고 수입 물량도 추가하지 않으면서 현상태를 유지하자는 주장이다.
일부 학자와 농민단체와 야당 일각의 요구다.
2004년 쌀 협상 당시 협정문에 '2015년부터는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아무것도 명시적으로 규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근거로 들고 있다.
특히 도하개발아젠다(DDA) 협상이 장기 표류하면서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모두 추가 양허를 하지 않고 현상 유지를 하고 있으므로 우리도 쌀의 관세화를 미루면서 MMA 물량도 더 이상 늘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법제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정부와 많은 전문가들은 "2015년 이후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은 '더 이상 관세화 유예라는 특별 취급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UR 협상은 1994년에 이미 타결된 협상이기 때문에 이 협상에서 발생한 의무, 즉 모든 농산물을 관세화 방식으로 개방한다는 의무를 지키지 않을 방법은 없다는 얘기다.
나아가 DDA는 새로운 규범 및 시장개방을 논의하는 협상으로 타결 전까지 각국에 부여되는 새로운 의무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는 설명이다.
-
△웨이버(일시적 의무면제) 신청필리핀과 같이 웨이버를 신청하는 경우이다.
웨이버란 관세화 유예를 의미하지만 한시적이라는 점이 다르다.
일단 웨이버 신청이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사실상 WTO 회원국 만장일치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한 나라라도 강하게 반대하면 통과시키지 않는 것이 관례다.
수많은 대가를 지불해야만 하는 가설이다.
필리핀의 경우 MMA 물량의 2.3배 증량, 모든 희망국에 쿼터 제공, 관세율 인하, 의무면제후 자도우 관세화 전환 등 상당한 '대가'를 제시했지만 동의를 얻지 못했다.
우리가 웨이버 신청을 하면 더 많은 국가들이 달려들어 MMA 증량은 물론이고 여타 농축산물에 대해서도 과도한 추가 개방을 요구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무엇보다 MMA 물량이 두배 이상 늘어나면서 농업기반이 송두리째 흔들릴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
△관세화 전환현상유지와 웨이버의 한계속에 부득불 '관세화'로 초점이 모아지고 있다.
현실여건 속에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해 관계자와 전문가, 관계부처 의견을 수렴중인 정부는 오는 20일 공청회를 열어 최종 여론을 수렴한 뒤 6월 중 '쌀 관세화'를 선언할 것으로 보인다.
사실상의 '개방'이지만 정부는 끝내 '관세화'라는 표현을 고수하고 있다. 정부의 고뇌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한동안 이동필 농림부 장관이 총대를 메고 개방을 선언한 뒤 책임을 지는 차원에서 장관직을 물러날 것이라는 그럴싸한 얘기들도 떠돌았다.
상당수 전문가들은 불가피하다면 정부가 쌀 시장을 전향적으로 개방하되 농가의 산업대책을 세우고 관세율을 높여 실리를 챙길 것을 주문하고 있다.농촌경제연구원이 발표한 '쌀 개방을 전제로 한 관세율 시나리오와 대응방안'에 따르면 정부가 생각하는 관세율은 300~500%가 될 것으로 보인다.
관세 200% 정도면 수입쌀이 국내쌀보다 더 비싸질 수 있다. 현재 의무적으로 수입되는 쌀에 대해 붙는 관세는 고작 5%에 불과하다.
-
◇ 高관세율...'산 넘어 산'
문제는 고관세율 또한 우리 희망사항일 뿐이라는 점이다.WTO는 회원국들에게 쌀을 포함해 모든 상품에 대해 자유롭게 교역할 것을 강제하고 있다.
그래서 수입이 제한되는 지나친 고관세율에는 쉽사리 동의하지 않고 있다.
우리 정부가 300% 이상의 관세율을 정해 이달중 국회에 보고하고 관련 양허안을 9월에 WTO에 제출해도 넘어야 할 산이 또 하나 남아있는 셈이다.
앞서 우리보다 일찍 쌀 시장의 문호를 연 일본과 대만의 경우도 최종 승인까지 각각 2년과 5년이 소요됐다.
전문가들은 그래서 만약 쌀 시장 개방쪽으로 가닥이 잡힌다면 WTO와의 끊질긴 협상을 통해 반드시 300%의 이상의 관세율을 관철시켜야 한다고 조언한다.
우리나라도 한때 쌀 조기 개방을 검토한 적이 있다.의무수입 물량에 대한 부담 때문이었다. 차라리 쌀을 조기 개방해 관세를 붙여서 우리 쌀과 경쟁을 붙이는 것이 유리하다는 판단에서 였다.
하지만 '개방'은 늘 정서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때마침 미국산 쇠고기 파문이 일면서 농업문제는 건드리기 힘든 이슈가 됐다.
누구도 감히 나서지 못하는 상황으로 회귀되면서 조기 개방의 기회를 놓쳐버렸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다.엄청난 정치적 부담과 사회적 논란이 자명하다.
치열한 논쟁을 거쳐 국민의 동의를 구하고 마침내 실사구시의 합리적인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최선을 추구하되 최악도 피해야 하는 냉엄한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