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벨라오페라단 오페라 '라보엠' 로돌포 역으로 국내 오페라 무대 데뷔이태리서 오페라 주역 150여회 하며 승승장구, 카리스마 넘치는 음색과 무대 위 여유 겸비한 전천후 테너 평가
  • ▲ 테너 지명훈 ⓒ뉴데일리
    ▲ 테너 지명훈 ⓒ뉴데일리

     

    테너 지명훈이 13년 만에 고국 땅을 밟았다. 그가 국내 데뷔작으로 선택한 작품은 라벨라오페라단이 지난달 21일부터 23일까지 국립극장서 공연한 푸치니 오페라 '라보엠'.

    오페라 주역만 150여회, 그 중 라보엠 '로돌포' 역만 30여회 소화하며 유럽 무대를 종횡무진한 그에게 한국에서의 '라보엠'은 그 어느 때보다 특별한 경험으로 다가왔다고 한다.

    "최근 2~3년 동안 '토스카', '일 트로바토레' 등 드라마틱하고 무거운 역을 해오다 오랜만에 섬세하고 서정적인 '라보엠'을 하게 돼 정말 반가웠습니다. 오랜 친구를 만난 것 같기도 했고 한국에서 성악가로서 새로운 인생을 다시 시작한다는 느낌도 들었죠. 또 국내 데뷔라는 점에서 걱정도 많았고 기대 또한 컸어요. 아직 한국에 적응이 덜 되서인지 이번 공연에선 제가 가진 100%를 보여드리진 못했지만 다음번 공연때는 그 이상의 것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라보엠' 공연이 끝나고 며칠 후 예술의전당 근처에서 만난 테너 지명훈은 이번 공연에 대해 이같은 소감을 전했다. 

    유럽 무대에서 선 굵은 연주를 펼치며 현지 평론가들로부터 '영웅적인 테너', '카리스마가 넘치는 테너'라는 평을 받은 그이지만 직접 만난 테너 지명훈은 선한 눈매와 진실된 목소리를 가진 '순수한 소년'같은 이미지를 풍겼다. 그래서인지 군더더기 없이 담백한 그의 목소리에 더욱 귀가 기울여졌다.

  • ▲ 에센셜 파바로티 카세트 테이프 ⓒ유튜브 캡처
    ▲ 에센셜 파바로티 카세트 테이프 ⓒ유튜브 캡처

     


    그가 성악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남달랐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친구가 선물로 준 '에센셜 파바로티' 카세트 테이프를 처음 듣고 큰 충격에 빠졌다고 한다.

    "어릴 때 마이클 잭슨 같은 외국 가수의 노래를 따라부르는 걸 좋아했어요. 그러던 중 파바로티가 부른 '여자의 마음((La Donna e Monbile)'을 처음 듣고 너무 충격을 받았어요. 세상에 이런 노래가 있다니! 그땐 성악이 뭔지도 몰랐죠. 그저 파바로티의 노래가 너무 좋아 뜻도 모른 채 모든 노래를 달달 외우고 따라불렀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말도 안되는 엉터리 발음으로요."

    그렇게 수 년 동안 파바로티의 노래를 무작정 따라 불렀던 지명훈은 군대 제대 후 본격적으로 성악 공부를 시작했고, 거짓말처럼 몇 년 뒤에는 파바로티가 누비던 이탈리아 무대에서 '리골레토' 만토바 공작 역으로 오페라 데뷔를 하게 됐다.

  • ▲ 테너 지명훈의 오페라 데뷔 무대 오페라 '리골레토' ⓒ유튜브 캡처
    ▲ 테너 지명훈의 오페라 데뷔 무대 오페라 '리골레토' ⓒ유튜브 캡처

     


    "리골레토 첫 공연에서 '여자의 마음'을 불렀던 순간을 잊을 수가 없어요. 파바로티 음반으로 듣던 노래를 제가 직접 무대에서 부르게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으니까요.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도 주변 사람들과 관객들 모두 제가 '여자의 마음'을 부르면 덩달이 기분이 좋아진대요. 제 마음이 느껴지나봐요."

    오페라의 본 고장인 이탈리아는 오페라 팬 층이 워낙 두텁고 국민 모두가 성악가이자 평론가로 불릴만큼 연주자들에 대한 잣대가 엄격하다. 국내 관객들은 박수나 '브라보'에 후한 편이지만 이탈리아 관객들은 만족스럽지 않은 연주에 절대로 '브라보'를 외치지 않는다.

    그런 분위기의 무대에서 동양인이 주역을 맡게 되면 부담감은 배로 늘어난다. 동양인 성악가에 대한 선입견도 깨야하고 유럽 팬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실력도 확실히 보여줘야한다는 부담이 겹치기 때문이다.

    테너 지명훈도 예외는 아니었다. 3년 전 이탈리아 파르마 왕립극장에 '아이다' 공연을 할 때 아찔했던 기억이 있다는 것이다. 파르마 왕립극장은 테너가 노래를 못하면 관객들이 무대로 토마토를 던졌다는 일화가 전해질만큼 까다롭기로 유명한 오페라 극장이다.

  • ▲ 이탈리아 파르마 왕립극장 오페라 '아이다' ⓒ유튜브 캡처
    ▲ 이탈리아 파르마 왕립극장 오페라 '아이다' ⓒ유튜브 캡처

     


    '라다메스' 역으로 2명의 테너가 캐스팅이 된 상황이었고 지명훈은 2번째 캐스팅으로 첫번째 테너의 공연을 지켜보고 있었다.

    "당시 테너 노래가 그리 나쁘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테너 노래가 끝나고 관객들이 박수를 치니 객석 한쪽에서 누군가가 '쉿' 소리를 내며 박수를 못치게 하더라고요. 4막에서 테너가 죽는 장면이 나오는데 한 할머니 관객분이 "넌 1막에서 죽었어야 했어"라고 크게 외치시는거에요. 그 후로 관객들이 테너가 노래를 부를때마다 야유를 보내고 박수도 치지 않았죠. 다음날 그 무대에 서야하는 저로서는 엄청난 부담과 두려움이 밀려왔죠. 그래도 다행히 공연을 잘 마쳤고 '브라보'도 들었어요."

    까다로운 파르마 왕립극장에서 실력을 인정을 받은 지명훈은 그 후 오페라 '스티펠리오'에 캐스팅 돼 다시 한 번 파르마 극장에 섰으며 그 후로도 이탈리아 볼로냐 극장 등 세계적인 무대에서 '일 트로바토레', '토스카' 등의 주역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쳐왔다.

    그는 특유의 카리스마와 비장함, 영웅적인 테너로서의 힘과 컬러는 물론 무대 위에서의 여유까지 겸비한 '전천후 테너'로 이탈리아 오페라계에서 상당한 대우를 받으며 승승장구했다. 그런 그가 돌연 한국행을 결정한 것은 '소통의 부족' 때문이었다고 한다.

    "외국 오페라계는 '약속된 관계'라는 느낌이 강해요. 외국 가수들과 무대에 설 때는 '호흡'을 맞춘다기 보다 '내 것만 잘 하자'라는 생각이 크고 약속된 시간에만 만나 정해진만큼만 연습을 하죠. 캐릭터나 극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고 음악적인 견해도 주고 받고 싶지만 공연이 끝나면 모두 '남'으로 돌아가요. 성악가 이전에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함께 모여 이야기도 나누고 음악을 즐기고 싶었지만 그게 안되다보니 음악적 외로움이 커지더라고요."

  • ▲ 오페라 '라보엠'에서 테너 지명훈(로돌포 역)과 소프라노 김지현(미미 역) ⓒ라벨라오페라단
    ▲ 오페라 '라보엠'에서 테너 지명훈(로돌포 역)과 소프라노 김지현(미미 역) ⓒ라벨라오페라단

     


    이번 '라보엠' 공연을 하면서 지명훈은 큰 위안과 따뜻함을 얻었다고 한다.

    "한국 성악가들과 스태프들은 서로를 도와주고 잘 챙겨주며 진정한 '호흡'을 맞추는 하나의 팀으로 느껴졌어요. 오페라는 가수 한 명의 역량보다는 성악가, 오케스트라, 지휘, 연출 등 모두의 합이 잘 맞아야하는 종합예술이기 때문에 이들 간의 호흡이 극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죠. 그런 면에서 한국 오페라만이 가진 역량이 발휘되는 것 같습니다. 세계적으로 마케팅만 잘된다면 한국 오페라는 이탈리아 오페라에 결코 뒤지지 않는 수준급 공연으로 대접받을 수 있을거라 생각해요."

    앞으로 지명훈은 연말에 예정된 송년 음악회와 내년 독일 프랑크프루트 까르미나브라나 초청을 받아 솔리스트로 무대에 서는 등 바쁜 일정을 목전에 두고 있다. 또한 국내에서 다양한 오페라와 클래식 무대에 서며 국내 팬들과의 만남에도 힘을 쏟을 예정이다.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꿈과 비전을 묻는 기자에게 테너 지명훈은 그 답게 소박하면서도 폐부를 찌르는 현답(賢答)을 내놓았다.

    "아프리카의 어느 마을에 가면 다이아몬드가 굴러다니는데도 그게 뭔지 몰라서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음악도 그런 것 같아요. 그 가치를 아는 사람에겐 음악이 다이아몬드가 될 수 있죠. 어떻게보면 철 없는 이야기일 수 있지만 저는 음악을 통해서 유명세나 명예를 얻는것보다 그저 음악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과 함께 음악이 주는 순수한 기쁨을 나누고 싶어요. 그들과 함께 생각과 마음을 공유하며 평생 진실로 노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모임에 가면 처음에는 화려한 옷을 입고 현란한 입담을 뽐내는 사람에게 눈길이 가기 마련이다. 그러나 모임이 끝나고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사람은 짧은 말 한마디에도 진심이 느껴지는 사람이다. 음악에 관한 그의 진심은 아주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