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도 직면' 여천NCC… 한화 "살리자" vs DL "답 없다"중국발 공급과잉 지속… 국내 NCC 업체 '팔아도 손해''신용도 강등·자금 경색' 등 예고된 위기 방치한 탓정부 뒷짐 진 사이 기업 자구책 한계… 산업 전반 불안
  • ▲ 석유화학업종의 만성적 불황으로 경영난을 겪고 있는 전남 여수 여천NCC 2사업장. ⓒ여천NCC
    ▲ 석유화학업종의 만성적 불황으로 경영난을 겪고 있는 전남 여수 여천NCC 2사업장. ⓒ여천NCC
    국내 3위 에틸렌 생산업체인 여천NCC가 부도 위기에 직면하며 관련 업계와 인근 지역은 물론 산업 전반에 불안감이 확산하고 있다. 이번 위기가 국내 석유화학기업이 처한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는 점에서 여천NCC를 시작으로 연쇄 디폴트가 현실화할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석유화학은 반도체·자동차와 함께 수출·제조업 경쟁력의 기반이 되는 ‘기간산업의 축’이이며, 여수산단은 고용과 지역 경제의 핵심이다. NCC업체의 도산은 협력업체의 연쇄 부도와 산단 전체 붕괴로 이어질 수 있는 만큼 이번 사태를 한국 제조업의 뿌리를 흔드는 심각한 신호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여천NCC 심폐소생 급한데… 한화 vs DL 자금지원 이견

    11일 업계에 따르면 여천NCC는 석유화학 업황 악화에 따른 적자 누적으로 이달 말까지 약 3100억원의 운영자금이 부족할 것으로 확인됐다. 회사채 발행과 대출 등 자금 확보 수단이 모두 막힌 가운데 오는 21일까지 자금을 마련하지 못하면 채무불이행(디폴트)이 불가피하다.

    여천NCC는 한화솔루션과 DL케미칼이 1999년 합작 설립, 지분을 절반씩 나눠 갖고 있다. 여천NCC는 2022년 3477억원, 2023년 2402억원, 2024년 2360억원의 당기순손실을 기록했고, 올 3월 두 그룹이 1000억원씩 출자를 했지만 추가 지원이 필요한 상황이다.

    한화솔루션은 지난달 30일 이사회에서 여천NCC에 1500억원을 지원하기로 하고 DL그룹에도 자금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DL그룹은 경영 부실을 해결하지 못하면 워크아웃을 신청하는 게 낫다며 자금지원을 거부, 여천NCC의 부도 위기가 현실화하게 됐다.

    여천NCC는 국내 에틸렌 생산능력 3위 기업으로, 업황 사이클에 따라 연간 3000억원에서 1조원대의 영업이익을 내던 알짜 회사다. 합작 이후 25년간 DL그룹은 누적 2조2000억원의 배당액을 수령했는데, 1500억원의 추가 자금지원을 회피하며 ‘모럴 해저드’란 지적이 제기됐다.

    DL그룹 지주사인 ㈜DL은 이날 긴급이사회를 열고 여천NCC의 모회사인 DL케마칼에 대한 자금 확충안을 논의한다. ㈜DL 이사회 결정에 따라 여천NCC의 생존 여부가 갈리게 된 셈이다. 여천NCC는 합작 계약에따라 증자 또는 자금 대여에서 한쪽 주주 단독 추진이 불가능하다.

    중국발 공급과잉 현실화… 멈춰선 여수·울산·대산 석화단지

    여천NCC 디폴트 위기는 예고된 재앙이란 지적이 나온다. 중국이 2020년 이후 자체 생산능력을 대폭 키우며 ‘산업의 쌀’로 불리는 에틸렌은 물론 ‘캐시카우’였던 폴리프로필렌(PP)과 테레프탈산(TPA), 폴리에틸렌(PE) 등 국내 석유화학기업의 범용제품들이 경쟁력을 잃게 됐다.
  • ▲ HD현대오일뱅크는 롯데케미칼과 나프타분해설비(NCC)를 통합 운영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다. ⓒHD현대오일뱅크
    ▲ HD현대오일뱅크는 롯데케미칼과 나프타분해설비(NCC)를 통합 운영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다. ⓒHD현대오일뱅크
    지난 30년 동안 한국의 최대 고객이던 중국은 이제 최대 경쟁자가 됐다. 중국의 에틸렌 생산량은 연 5200만톤(t) 규모로, 우리나라(1090만t)의 다섯 배에 달한다. 중국에서 소화하지 못한 저가 범용제품이 한국에 밀려들자 한국 다운스트림 기업들도 국산 에틸렌을 외면했다.

    중동은 미래의 경쟁자다. 막대한 ‘오일머니’를 무기로 원유를 뽑아낸 자리에서 석화제품을 뽑아내는 정유·석유화학 통합공장(COTC)을 8개나 짓고 있다. 중동의 예상 에틸렌 생산량은 연 1123만t으로, 현재 우리 기업의 생산량을 뛰어넘는다.

    석유를 직접 조달하는 중동은 중국보다 저렴한 가격에 에틸렌을 만들 수 있다. 업계에선 현지에서 가동에 들어간 일부 공장의 에틸렌 생산단가는 t당 200달러 이하로, 300달러 안팎인 중국산보다 30% 이상, 한국보다는 40% 이상 저렴한 것으로 보고 있다.

    여수, 울산, 대산(충남) 등 국내 3대 석화단지의 엔진이 꺼지고 있다. 울산산단은 지난해부터 총 10개 공장이 문을 닫거나 가동을 멈췄다. 효성화학은 TPA 공장과 프로판탈수소화(PDH) 공장 일부 가동을 중단했다. 롯데케미칼은 PET와 고순도이소프탈산(PIA) 일부 공장 가동을 중단했다. 태광산업, SK지오센트릭 등도 가동 중단에 동참했다.

    국내 최대 산단인 여수산단도 마찬가지다. 지난 8일 여천NCC가 에틸렌 3공장을 세웠다. LG화학과 롯데케미칼도 일부 생산라인을 멈췄다. 여수산단의 NCC 공장 가동률은 2021년 87%에서 지난해 78.5%로 하락했다. 대산산단에선 롯데케미칼과 HD현대오일뱅크가 나프타분해설비(NCC)를 통합 운영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다.

    "위험 신호 외면해온 대가… 산단 전체 붕괴 가능성도"

    국내 석유화학업계의 위험 신호는 꾸준히 감지됐다. 제품을 팔아도 손해를 보는 '역마진' 상황이 지속되고, 글로벌 수요 위축과 중동·미국산 경쟁까지 겹치며 실적 타격이 불가피했다. 실적 악화와 함께 자금 경색이 지속되며 기업들은 벼랑 끝에 몰렸다.

    석유화학기업들의 신용등급도 연쇄 하락했다. 적자가 본격화한 2022~2023년 국내 신용평가사들은 롯데케미칼의 신용등급 전망이 하향 조정했고 효성화학의 신용등급은 ‘A’에서 ‘A-’로 내렸다. 여천NCC의 신용등급은 ‘A+’에서 ‘A’로 강등했다.

    LG화학, 한화솔루션, 한화토탈에너지스, 여천NCC, SK지오센트릭, HD현대케미칼의 등급 전망이 모두 하향 조정됐다. 재무구조가 개선되지 않으면 향후 수개월 내 등급 하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경고였다. 올 들어 롯데케미칼의 신용등급은 ‘AA’에서 ‘AA-’로 떨어졌다.

    지난해 1503억원의 영업손실을 낸 여천NCC를 비롯해 롯데케미칼(-8941억원), LG화학(석화부분, -1358억원), 한화솔루션(석화부분, -1213억원), 효성화학(-1705억원) 등 주요 기업이 적자를 냈다. 정부가 뒷짐 진 사이 기업 자구책이 한계에 다다르면서 올해도 수천억원대 적자가 불가피하다는 전망이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석유화학산업은 한국 경제의 뿌리산업이자 제조업 기반을 떠받치는 핵심 분야로, IMF 위기 때도 경제 회복을 주도했다”며 “석유화학 붕괴는 제조업 전체 쇠퇴로 이어질 수 있다. 이 산업의 부활 없이는 한국 경제의 지속 성장이 어렵다는 점에서 정부의 적극적 개입이 시급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