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전쟁 장기화에 4월 말 '산업 셧다운' 우려 현실화정부, 러시아 이어 인도·UAE에 원유와 나프타 공급 요청전쟁 끝날 때까지 '시간 벌기' 전략…국가 역량 총동원"국가 산업 기반 위기, 중장기적으로 에너지 자립도 높여야"
  • ▲ 구윤철 부총리 겸 재정경재부 장관이 26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관계부처와 합동브리핑을 열고 중동 전쟁에 따른 비상경제 대응방안을 발표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 구윤철 부총리,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 2026.03.26. ⓒ뉴시스
    ▲ 구윤철 부총리 겸 재정경재부 장관이 26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관계부처와 합동브리핑을 열고 중동 전쟁에 따른 비상경제 대응방안을 발표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 구윤철 부총리,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 2026.03.26. ⓒ뉴시스
    중동 전쟁 장기화로 원유와 나프타 수급 불안이 심화되면서 정부가 국가 운명을 걸고 추가 물량 확보에 나서고 있다. 4월 말에서 5월 초로 예상되는 이른바 '산업 셧다운' 우려가 점점 현실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원유에 대한 자원안보 위기경보 단계를 '주의'에서 '경계'로 격상하고, 러시아에 이어 인도와 아랍에미리트(UAE)까지 추가 물량을 요청했다. 중동 전쟁이 끝날 때까지 '시간 벌기'에 총력전을 벌인다는 전략이다.

    2일 정부와 업계에 따르면 산업통상부는 지난달 30일 LG화학 등 주요 석유화학 기업과 공조해 러시아산 나프타를 긴급 도입하는 데 성공했다. 확보 물량은 국내 기준 약 3~4일 가동에 해당하는 2만7000톤(t) 수준이다. 단기적인 '버퍼 물량' 확보에는 성공했지만, 전쟁 장기화로 수급 불안이 지속될 경우 근본적인 대응에는 한계가 있다는 평가다.

    이에 따라 정부는 추가 물량 확보를 위해 외교·통상 채널을 총동원하고 있다. 현재 인도 및 UAE와의 실무 협의가 본격화된 상태로, 양국을 상대로 나프타 및 원유 도입 확대를 요청했다. 여한구 산업부 통상교섭본부장은 1일 서울 여의도 FKI타워에서 열린 한국경제인협회 글로벌 경제현안 대응 기업 간담회 후 기자들과 만나 이같이 밝혔다.

    UAE는 한국의 주요 원유 공급국 가운데 하나로, 중동 전쟁이 터지자 2400만배럴의 원유를 한국에 우선 공급해주기로 약속했다. UAE로부터 긴급 확보한 원유는 속속 한국에 도착하고 있다. 지난달 6일 양국이 긴급 도입에 합의한 원유 600만배럴 중 200만배럴이 지난달 30일 국내 하역을 시작했고, 국내에 보관 중이던 국제 공동 비축 물량 200만배럴은 이미 정유사에 인도를 마쳤다. 나머지 200만배럴도 이달 초중순 하역될 예정이다. 추가 확보한 1800만배럴의 경우 200만배럴이 지난달 25일 여수 석유 비축기지에 하역되는 등 도입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인도 역시 대체 공급선으로 부상하고 있다. 여 본부장은 "인도 상무장관을 만나 여러 이야기를 하며 나프타 관련 협력을 검토해달라고 요청한 단계"라며 "(향후) 실무적으로 상세히 이야기해 봐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는 러시아, UAE, 인도 외에도 미국·북해산 등 원유 수입을 다변화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에너지 업계 관계자는 "러시아 물량 확보로 급한 불은 껐지만, 전쟁 상황이 장기화될 경우 추가 확보 없이는 산업 전반이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며 "다변화된 공급망 확보가 절실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 ▲ 한국석유공사 서산비축기지. (사진=한국석유공사 제공) ⓒ뉴시스
    ▲ 한국석유공사 서산비축기지. (사진=한국석유공사 제공) ⓒ뉴시스
    실제 국내 석유화학 산업의 공급망은 중동 위주로 짜여져있다. 우리나라는 나프타의 약 55%를 국내 정유사가 생산하고, 나머지 45%는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이 수입 물량의 77%가 중동산이다. 정유사가 수입하는 원유의 70%도 중동산이다. 중동 지역 정세 악화가 공급망 위기로 직결되는 구조다. 

    '산업의 쌀'로 불리는 나프타는 에틸렌, 프로필렌 등 기초유분 생산의 핵심 원료다. 반도체·자동차·플라스틱 등 거의 모든 제조업의 출발점이며, 종량제 봉투, 라면 봉지 등 생활 용품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된다. 

    업계에서는 추가 물량 확보에 실패해 현재와 같은 공급 차질이 지속될 경우 4월 말이나 5월 초부터는 '산업 셧다운'이 실제로 일어날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이미 국내 최대 에틸렌 생산 능력을 갖춘 여천NCC가 가동률을 80%대에서 60%대로 낮추고 '불가항력'을 선언했다. LG화학 여수공장도 여수산단 내 NCC 2공장 가동을 중단했다. 다른 석화 기업들도 납품사에 공급 차질을 통보하고 있다.

    정부도 이러한 위기 상황을 반영해 에너지 경보 체계를 상향 조정했다. 산업부는 2일 0시를 기해 원유에 대한 자원안보 위기경보를 기존 '주의'에서 '경계'로 격상하기로 했다. 이는 총 4단계(관심-주의-경계-심각) 가운데 세 번째 단계로, 공급 차질이 현실화되고 대응 조치가 본격화되는 수준이다. 천연가스에 대해서도 '관심'에서 '주의'로 격상했다.

    경보 격상에 따라 정부는 비축유 방출, 수입선 다변화, 수요 관리 등 가능한 모든 정책 수단을 동원할 계획이다. 필요할 경우 민간 재고 활용 확대나 긴급 수급 조정 조치도 검토 대상에 포함된다. 앞서 정부는 나프타에 대해 수출 제한과 내수 우선 공급을 골자로 한 긴급 조치를 시행한 바 있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에너지 공급망 구조 자체를 재점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 에너지 업계 관계자는 "지금은 단순한 수급 문제가 아니라 국가 산업 기반이 흔들릴 수 있는 위기 상황"이라며 "단기적으로는 물량 확보에 집중하되, 중장기적으로는 에너지 자립도를 높이는 방향으로 정책 전환이 필요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