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환율, 이벤트 아닌 구조 변화 … 연평균 환율 4년 상승이 남긴 경고달러 자산 격차·고환율 심리 고착되면 자산 양극화·환율 악순환 심화성장·자본시장·환위험 관리 재설계 … 정책·금융·기업 새 안전판 시급
  • ▲ ⓒ쳇GPT
    ▲ ⓒ쳇GPT
    원·달러 환율이 1470원 선을 넘보면서 한국 경제 전반에 '조용하지만 깊은 금'이 퍼지고 있다. 제조업의 원가 부담은 치솟고, 금융권은 기업여신 건전성 악화를 우려하며 리스크 점검 빈도를 높이고 있다. 외환시장 변동성이 실물·금융을 동시에 흔드는 전형적 '퍼펙트 스톰'의 그림자다. 정부는 단기 유동성 공급과 외환시장 안정화 조치에 나섰지만, 글로벌 투자자 신뢰 회복과 기업들의 환위험 관리 없이는 충격이 장기화될 수 있다. 본지는 3부작 기획을 통해 한국 경제가 살아남기 위해 어떤 새로운 안전판을 세워야 하는지 면밀히 짚어본다. <편집자 주>

    고환율이 기업 재무와 금융권 여신 건전성을 동시에 압박하는 국면에서 초점은 “환율이 어디까지 오르느냐”가 아니라 “어떤 환율 수준을 전제로 시스템을 다시 설계할 것인가”로 이동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지금의 환율을 단기간에 되돌아갈 ‘이벤트성 쇼크’가 아니라, 성장 구조와 자금 흐름 변화가 만들어낸 ‘뉴노멀 환율’로 인식해야 한다고 진단한다. 외환시장 안정, 금융권 안전망, 기업의 환위험 관리가 새 기준선 위에서 동시에 작동하지 않으면, 한 번의 충격이 구조적 위기로 전이될 수 있다는 경고다.

    ◇"위기 때 보던 환율이지만, 지금은 ‘새 기준선’에 가깝다"

    외환시장 안정을 향한 공감대는 분명하다. 다만 숫자 자체보다 변동성과 예측 가능성이 더 큰 문제라는 지적이 나온다. 단기 구두개입과 비상 점검만으로는 시장 불안을 완전히 잠재우기 어렵고, 정책 방향 메시지가 자주 바뀌면 기업과 금융회사의 의사결정은 더 위축될 수밖에 없다.

    정책 수단으로는 외환보유액을 활용한 시장안정 조치를 기본으로 하되, 필요시 외화 유동성 공급 창구 점검, 통화스와프 네트워크 유지·확대, 거시건전성 규제의 탄력적 운용 등을 조합하는 방안이 거론된다. 특정 환율 레벨을 사실상 ‘목표치’처럼 내세우기보다는, 과도한 쏠림과 일별 급등락을 완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것이 현실적이라는 평가다.

    박형중 우리은행 이코노미스트는 “원·달러 1400원대는 과거 한국이 위기 국면에서나 경험했던 구간인 것은 맞지만, 현재를 1997년 외환위기나 2008년 금융위기와 같은 상황으로 보기는 어렵다”며 “지금의 환율은 단기 이벤트라기보다 경제 구조 변화가 반영된 새로운 균형에 가깝다”고 말했다.

    그는 저성장 고착과 잠재성장률 하락, 세계 경제에서의 한국 위상 약화, 가계·기관의 해외투자 확대를 복합 요인으로 꼽았다. 개별 사건이나 정책 실수 때문에 환율이 일시적으로 튀어 오른 것이 아니라, 성장축과 자금 흐름이 바뀐 결과라는 해석이다.

    조용구 신영증권 연구원도 “환율 레벨 자체가 부담이지만 더 큰 문제는 고환율이 내수와 경제 전반에 미치는 부정적 파급”이라며 “한국은 고부가가치 제조 비중이 높아 환율 상승이 예전처럼 수출 확대 효과로 이어지기 어렵고, 기업·가계 모두 체감 부담이 크다”고 분석했다.

    권아민 NH투자증권 연구원은 “최근 환율 흐름은 ‘수출이 좋아도 달러가 시장에 잘 나오지 않는 구조’가 핵심”이라며 “기업들이 벌어들인 달러를 보수적으로 보유하는 가운데, 직접투자·주식·채권 등 해외투자 수요가 꾸준히 이어지면서 수급이 디커플링된 모습”이라고 진단했다.

    ◇연평균 환율 4년 상승·해외투자 확대 … “사이클 아닌 구조 변화”

    전문가들이 공통으로 짚는 대목은 ‘시간’이다. 단기 반등이 아니라 몇 년에 걸쳐 누적된 흐름이라는 점이다.

    박 이코노미스트는 “연평균 원·달러 환율이 2021년 이후 4년 연속 상승한 것은 국내 환율 역사에서 초유의 일”이라며 “환율 상승이 일시적이지 않은 것임을 시사한다”고 설명했다.

    같은 기간 국내 거주자의 해외투자는 빠르게 증가했다. 그는 “GDP(국내총생산) 대비 해외투자 비율을 보면 우리나라의 해외투자는 주요 선진국보다 아직 낮은 편이어서, 중장기적으로 해외투자 확대 흐름이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며 “이 구조가 유지되는 한, 원·달러 환율도 과거보다 높은 수준을 유지할 공산이 크다”고 전망했다.

    권 연구원도 “2~3년 전만 해도 1300원대를 ‘뉴노멀’로 보자는 얘기가 나왔는데, 고환율 구간이 장기화되면서 지금은 일정 수준의 높은 환율에 경제 주체가 적응이 필요하다는 시각이 더 많아졌다”고 말했다.

    이런 흐름 속에서 가장 우려되는 지점은 ‘격차’와 ‘심리’다. 박 이코노미스트는 “고환율이 오래 지속되면 달러 자산 보유 여부에 따라 자산 격차가 더 벌어지고, 그 과정에서 소득·자산 양극화가 심화될 위험이 있다”며 “가계와 기업의 ‘고환율이 당연하다’는 심리가 굳어질 경우, 그 기대 자체가 다시 환율 상승 압력으로 되돌아오는 악순환이 나타날 수 있다”고 지적했다.
  • ▲ ⓒ연합뉴스
    ▲ ⓒ연합뉴스
    ◇인위적 환율 인하는 한계 … 장기 해법은 성장성과 자본시장 경쟁력

    정책 방향과 관련해서는 ‘레벨 관리’보다 ‘체질 개선’에 무게가 실린다.

    박 이코노미스트는 “인위적인 원·달러 환율 하락 유도는 오히려 부작용이 커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장기적으로 한국경제의 활력과 성장성을 높이고, 한국 자본시장의 투자매력이 높아진다면 자연스럽게 해외투자가 줄면서 자연스럽게 환율 상승압력이 해소될 것"이라며 "정책의 장기 주안점은 여기에 둬야할 것”이라고 말했다.

    단기적으로 취할 수 있는 수단도 제시했다. 박 이코노미스트는 “단기적으로는 ‘스무딩 오퍼레이션’과 함께 은행의 선물환 포지션규제, 외화 LCR(유동성커버리지비율) 조절 등을 고려해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권 연구원은 실제 당국 카드로 “국민연금의 전략적 환헤지, 한국은행과 국민연금 간 외환스와프, 은행 선물환 포지션 한도 완화, 외화대출 용도 규제 완화” 등을 예로 들면서도 “이러한 조치들은 환율 상승 속도와 상단을 누르는 역할은 할 수 있지만, 근본적인 수급 구조를 뒤집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평가했다.

    박상현 iM증권 연구원은 대외 변수에 주목했다. 박 연구원은 “미국 통화정책이 완화로 전환되기 전까지 달러 강세 기조가 이어지면서 원·달러 환율이 1400원대 상단을 다시 시도할 가능성은 있다”면서도 “정부가 이미 한 차례 강도 높은 개입으로 시장 상단을 확인한 만큼, 급격한 추가 상승 위험은 다소 제한된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해외투자 확대 등 구조적 요인 탓에 외환수급을 단기간에 개선하긴 쉽지 않고, 현실적으로는 수출기업의 달러 공급 유인을 높이는 방향이 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금융권·기업 향한 시그널 … “안전판은 밖이 아니라 안에서 쌓아야”

    고환율의 ‘뉴노멀’ 인식은 금융권과 기업의 전략에도 직접적인 신호를 보낸다. 금융권에는 고환율·고금리·저성장 시나리오를 동시에 반영한 스트레스테스트를 전제로 취약 업종 익스포저, 비은행권 건설·부동산 연체율, 단기 외화조달 구조를 재점검하고, 필요시 자본·유동성·구조조정 지원이 연계된 ‘패키지형 대응’을 준비해야 한다는 과제가 주어진다.

    조 연구원은 감독당국이 반드시 점검해야 할 지표로 “엔화 방향성과 국내 외환수급 데이터”를 꼽으며 “엔화 약세가 이어질 경우 원화 약세 압력이 함께 강해질 수 있어, 관련 지표를 정교하게 모니터링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기업에는 환위험 관리 체계 재점검이 요구된다. 환율 1400원대가 일시적 ‘이탈 구간’이 아니라 정책·전략 수립의 출발점으로 자리 잡을 경우, 설비투자·원자재 조달·외화부채 구조를 전반적으로 다시 보는 작업이 불가피하다. 수출보다 수입 비중이 큰 내수 산업과 중소·중견 제조업의 부담은 더 클 수 있다.

    박상현 iM증권 연구원은 고환율 국면과 관련해 “고환율이라고 해서 현재 우리나라 경기나 금융시스템에 당장 큰 불안 요인이 나타난 상황은 아니다”라며 “엔화 약세 흐름이 환율에 부담을 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원·달러 환율이 1500원 선까지 치솟는 국면이 아니라면 개인적으로는 과도하게 우려할 단계는 아니라고 보고 있다”고 말했다.

    ◇"환율 내려가길 기다릴 시간 없다…고환율 전제로 한 재설계 필요"

    결국 남는 질문은 ‘전제’를 어떻게 둘 것인가다.

    박형중 우리은행 이코노미스트는 현재 환율 국면에 대해 “지금의 고환율은 일시적이거나 순환적인 요인 때문이 아니라 구조적인 변화의 결과라고 본다”며 “이를 단순한 사이클로만 보면 한국경제가 처한 여건을 잘못 판단하는 것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앞으로는 높은 환율 수준을 전제로 2026년 경제정책과 투자·산업·기업 정책을 설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정책 측면에서는 외환·재정·통화·금융정책을 하나의 프레임 안에서 정렬하고, 시장과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어떤 상황에서 어떤 수단을 쓸지”를 투명하게 공유하는 것이 신뢰 회복의 출발점이 된다. 금융권은 스트레스테스트와 완충자본, 포트폴리오 조정을 통해 부실의 전이를 차단하는 방화벽을 안에서부터 다시 쌓아야 한다. 기업은 환율 1300원대 복귀를 전제로 한 계획이 아니라, 1400원대 고착 가능성을 전제로 한 투자·차입·헤지 전략을 세우는 것이 요구된다.

    외환시장 안정, 금융권 안전망, 기업의 환위험 관리라는 세 축을 ‘높은 환율’이라는 새로운 기준선 위에서 얼마나 빠르고 일관되게 손질하느냐가, 한국경제가 ‘퍼펙트 스톰의 그림자’를 넘을지, 아니면 고환율을 구조적 약점으로 안고 갈지를 가를 분수령이 되고 있다.